고려 왕 계보 - 흘러간 10년 세월과 문무관 차별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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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발해 시대가 끝나고 고구려를 표방하는 고려가 들어선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지만, 시기적으로 고려는 발해가 망할 즈음에 북진을 했어야 했지만, 북진 정책이 너무나도 많이 느렸습니다.

발해가 926년까지 유지를 하였으므로 초기부터 신라, 백제보다는 발해를 염두에 뒀어야 했지만, 신라는 한참 뒤인 935년까지 유지됐으므로 약 10년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좋은 시기를 놓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 발해가 활동하던 만주 지방을 모조리 거란족, 여진족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일각에서는 고려가 고구려 이름을 씀으로써 여진족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갈로 불리던 여진족은 고구려의 구성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해가 망한 자리에 그대로 그곳에셔 나라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태조 918년부터 문종 1083년까지 165년간 동안 중앙집권적 국가기반과 귀족정치의 최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 1백년간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고, 그 뒤 다시 1백년간의 원나라 간섭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종종 세계지도에는 고려가 원나라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되는데, 간섭기가 맞으며 왕은 유지됐고, 100% 조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국시대도 아니고 중세로 여겨지는 고려사회는 의식 자체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회의 문·무반 차별 대우로 인해 무신정변이 발생했으며, 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을텐데 사회 불난은 증폭됐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대요.. 몽골족은 지도자의 충성을 맹세하며 전세계를 날뛰고 있었을때, 한반도는 해묵은 차별로 서로 싸우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당한 것이구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결국 왕은 폐위되고, 무신이 왕이 되어 나라를 이끄는 양상이 된 것이었고, 원나라 간섭으로 인해 이런 왕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1백년 연장된 것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이런 고려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에 대한 반역이었고, 왕의 권위가 고려 사회에서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려 왕조는 무신정권으로 한번, 원나라 간섭으로 두번, 이성계로 인해 세번이나 유린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1대 태조
918-943
왕건, 고려의 시조. 북진정책,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포섭함(왕권 안정).

2대 혜종
943-945
1대 태조 왕건의 맏아들.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에 시달림.

3대 정종
945-949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함. 재위기간은 4년.

4대 광종
949-975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함.

5대 경종
975-981
4대 광종의 맏아들. 976년 전시과 제정, 6년간 재위함.

6대 성종
981-997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최승로의 시무28조 수용),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세운 왕.

7대 목종
997-1009
5대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함.

8대 현종
1009-1031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6천여권)을 제작함. 관련사건: 강감찬의 귀주대첩.

9대 덕종
1031-1034
8대 현종의 맏아들. 국자감시를 실시함.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함.

10대 정종
1034-1046
8대 현종의 둘째 아들.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함.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함.

11대 문종
1046-1083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

12대 순종
1083-1083
11대 문종의 맏아들. 재위 3개월만에 죽음.

13대 선종
1083-1094
11대 문종의 둘째 아들.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임.

14대 헌종
1094-1095
13대 선종의 맏아들.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줌.

15대 숙종
1095-1105
11대 문종의 셋째 아들.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함.

16대 예종
1105-1122
15대 숙종의 맏아들.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재단 설립하는 등 학문 진흥에 힘씀.

17대 인종
1122-1146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 관련사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18대 의종
1146-1170
17대 인종의 맏아들.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폐위됨.

19대 명종
1170-1197
17대 인종의 셋째 아들. 정권을 장악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0대 신종
1197-1204
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만적의 난 등 민란이 잇달아 일어남.

21대 희종
1204-1211
20대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됨.

22대 강종
1211-1213
19대 명종의 맏아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겨 강화도로 갔다가 1211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름.

23대 고종
1213-1259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함.

24대 원종
1259-1274
23대 고종의 맏아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에게 폐위(1269), 4개월 만에 복위함. 개경환도(1270) 후,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항쟁 일어남.

25대 충렬왕
1274-1298, 1298-1308
24대 원종의 맏아들. 고려왕이면서, 원나라의 사위로 살아간 왕.

26대 충선왕
1298-1298, 1308-1313
25대 충렬왕의 아들.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27대 충숙왕
1313-1330, 1332-1339
26대 충선왕의 둘째 아들. 심양왕 고(충선왕의 조카)와의 정권다툼에 시달림.

28대 충혜왕
1330-1332, 1339-1344
27대 충숙왕의 맏아들. 방탕한 행동으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됨.

29대 충목왕
1344-1348
28대 충혜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해 12세에 죽음.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함.

30대 충정왕
1349-1351
28대 충혜왕의 서자. 12세에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3년만에 폐위됨.

31대 공민왕
1351-1374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공민왕 시해로 개혁 중단됨.

32대 우왕
1374-1388
공민왕이 시해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됨.

33대 창왕
1388-1389
32대 우왕의 아들. 9세에 즉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34대 공양왕
1389-1392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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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 계보 - 반쪽짜리 통일, 부끄러운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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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한국 역사에서 특히 왜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은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가 다스리는 왜 지역 사람들을 이용해서 신라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제는 한번이라도 확실하게 신라를 무너뜨린 적이 없었고 결국 신라-당 연합에 패했고, 지도층은 한반도에서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를 다 차지하지 못한채 반쪽짜리 통일을 이뤘고, 고구려 지역에는 발해가 들어서는데, 발해도 후에 특별한 이유없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고, 북방 지역은 여진족, 거란족, 만주족 등의 주거지가 되어 버렸으나, 이 민족들도 고구려와 연관이 크다는 얘기가 많이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고려, 조선과 형제의 나라란 표현을 많이 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은 그들을 끌어안을 전략도 생각도 없었다.


1대 혁거세 거서간
B.C. 57 - A.D. 4
신라 최초의 왕, 박씨의 시조

2대 남해차차웅
4 - 24
1대 혁거세의 맏아들(박씨)

3대 유리이사금
24 - 57
2대 남해차차웅의 아들(박씨).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4대 탈해이사금
57 - 80
2대 남해차차웅의 사위(석씨). 왜국의 다파나국 출신으로 석씨의 시조.

5대 파사이사금
80 - 112
3대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박씨)

6대 지마이사금
112 - 134
5대 파사이사금의 아들(박씨)

7대 일성이사금
134 - 154
3대 유리이사금의 맏아들(박씨) 혹은 일지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함.(삼국사기 기록)

8대 아달라이사금
154 - 184
7대 일성이사금의 맏아들(박씨). 왕비는 지마왕의 딸.

9대 벌휴이사금
184 - 196
4대 탈해이사금의 손자(석씨)

10대 내해이사금
196 - 230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석씨)

11대 조분이사금
230 - 247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이자 내해왕의 사촌(석씨). 왕비는 내해왕의 딸.

12대 첨해이사금
247 - 261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이자 조분왕의 친동생(석씨)

13대 미추이사금
262 - 284
김알지의 7대손(김씨).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으로 조분왕의 딸.

14대 유례이사금
284 - 298
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석씨)

15대 기림이사금
298 - 310
11대 조분이사금의 아들·손자·증손이라는 여러 설이 있음.

16대 흘해이사금
310 - 356
10대 내해이사금의 손자이자 제11대 조분이사금의 외손자.

17대 내물마립간
356 - 402
김씨에 의한 왕위독점세습 이룸. 왕권 강화되어 대군장 뜻하는 ‘마립간’ 왕호를 사용함(왕호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름).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함. 고구려 광개토대왕 도움으로 왜군 격퇴함.

18대 실성마립간
402 - 417
김알지의 후손(김씨). 왕비는 제13대 미추이사금의 딸. 내물마립간의 태자인 눌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함. 왕호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름.

19대 눌지마립간
417 - 458
17대 내물마립간의 아들(김씨).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장자상속제를 확립함. 433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함(나제동맹).

20대 자비마립간
458 - 479
19대 눌지마립간의 맏아들(김씨). 왜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림.

21대 소지마립간
479 - 500
20대 자비마립간의 아들(김씨). 백제·가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침.

22대 지증왕
500 - 514
17대 내물마립간의 증손. 503년 나라이름을 '신라'로, 왕호를 '왕'으로 바꾸며 왕권을 강화함. 순장법을 폐지하고 울릉도 우산국을 정복함.

23대 법흥왕
514 - 540
22대 지증왕의 맏아들. 율령 반포, 불교 공인(백성의 사상 통합), 골품제 정비, 상대등 설치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함. 금관가야 병합.

24대 진흥왕
540 - 576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공인하고, 황룡사 건립하여 신라의 국력 과시. 한강 유역 모두 장악, 대가야 병합, 함흥평야 진출 등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함(진흥왕 순수비).

25대 진지왕
576 - 579
24대 진흥왕의 둘째 아들.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국정을 맡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위 4년만에 폐위됨.

26대 진평왕
579 - 632
24대 진흥왕의 손자. 행정조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

27대 선덕여왕
632 - 647
26대 진평왕의 맏딸이자 신라 최초의 여왕.

28대 진덕여왕
647 - 654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강화함.

29대 태종무열왕
654 - 661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폐위된 진지왕의 손자).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짐.

30대 문무왕
661 - 681
29대 무열왕의 맏아들. 삼국 통일을 이루어 낸 왕.

31대 신문왕
681 - 692
30대 문무왕의 맏아들.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

32대 효소왕
692 - 702
31대 신문왕의 맏아들.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

33대 성덕왕
702 - 737
31대 신문왕의 둘째 아들. 신라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한 시기로 평가됨. 당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

34대 효성왕
737 - 742
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됨.

35대 경덕왕
742 - 765
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 전제왕권 재강화를 위해 노력함.

36대 혜공왕
765 - 780
35대 경덕왕의 아들(태종무열왕의 마지막 직계손). 8세에 즉위,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적 반란사건이 많았음.

37대 선덕왕
780 - 785
17대 내물왕의 10대손. 신라 하대(下代)의 첫 번째 왕.

38대 원성왕
785 - 798
17대 내물왕의 12대손. 788년, 독서 삼품과를 실시함.

39대 소성왕
799 - 800
38대 원성왕의 손자

40대 애장왕
800 - 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 13세에 즉위함. 숙부들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시해됨.

41대 헌덕왕
809 - 826
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소성왕의 친동생.

42대 흥덕왕
826 - 836
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소성왕/헌덕왕의 친동생.

43대 희강왕
836 - 838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

44대 민애왕
838 - 839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

45대 신무왕
839 - 839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이며, 제43대 희강왕의 사촌임. (관련인물 : 장보고)

46대 문성왕
839 - 857
45대 신무왕의 맏아들

47대 헌안왕
857 - 861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

48대 경문왕
861 - 875
43대 희강왕의 손자이자 제47대 헌안왕의 사위

49대 헌강왕
875 - 886
48대 경문왕의 맏아들

50대 정강왕
886 - 887
48대 경문왕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여왕
887 - 897
48대 경문왕의 딸로 신라시대 마지막 여왕

52대 효공왕
897 - 912
49대 헌강왕의 서자.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림.

53대 신덕왕
912 - 917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박씨). 916년 견훤에게 대야성을 공격당함.

54대 경명왕
917 - 924
53대 신덕왕의 아들(박씨). 신라 국력이 크게 쇠퇴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만 다스리게 됨.

55대 경애왕
924 - 927
54대 경명왕의 동생(박씨).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

56대 경순왕
927 - 935
신라의 마지막 왕(김씨),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름. 경순왕 9년에 자진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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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고구려 소설의 의아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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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가 쓴 고구려 소설은 13대 서천왕 시대라기 보다는 14대 봉신왕때부터 시작한다.

해모수 부터 1대 동명성왕(주몽), 2대 유리왕,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기록된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 6대 태조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을파소를 등용하고 진대법을 실시한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13대 서천왕까지 무려 14의 주요 스토리를 모두 빠트렸다.

물론 고구려라고 해도 주요 파트만 해서 만드는것은 작가 맘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라고는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는다.

김진명 작가 의도대로 삼국지에 버금가는 우리의 역사소설을 만들고 싶었다면 절대 14개의 주요 스토리를 뺄래야 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 소설은 무언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소설인 것 같다.

물온 고구려 초반부를 읽었지만, 시간의 흐름 순서 이다 보니 주몽 이야기는 작은 챕터로 간략하게 다룰 수는 있어도 내용을 모두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B.C. 37 - B.C. 19
고구려의 시조

2대 유리왕
B.C. 19 - A.D. 18
1대 동명성왕의 맏아들. 유리왕 22년,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김.

3대 대무신왕
18-44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기록되어 있음.

4대 민중왕
44-48
3대 대무신왕의 동생(삼국사기 기록)

5대 모본왕
48-53
3대 대무신왕의 맏아들.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음.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6대 태조왕
53-146
2대 유리왕의 손자. 옥저 정복.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를 완성함(왕위세습확립).

7대 차대왕
146-165
6대 태조왕의 동생. 왕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음. 차대왕 20년에 명림답부에게 살해됨.

8대 신대왕
165-179
6대 태조왕의 막내동생. 77세에 즉위함.

9대 고국천왕
179-197
8대 신대왕의 둘째 아들.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함. 을파소를 등용함.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구휼책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나감.

10대 산상왕
197-227
9대 고국천왕의 동생.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김

11대 동천왕
227-248
10대 산상왕의 아들.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었으나, 위기를 극복함.

12대 중천왕
248-270
11대 동천왕의 맏아들

13대 서천왕
270-292
12대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와 소발을 처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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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 소설 “고구려”1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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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을불이 주인공으로, 돌고의 아들로 봉상왕(상부)의 견제를 피해 낙랑에서 피신해 있다가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적었다.

안국군(달가)은 서천왕의 아들이자 봉상왕(상부)의 동생으로 상부는 왕이되자 공신인 안국군을 제일 먼저 죽였고, 곧이어 봉상왕(상부)의 동생 돌고와 그 아들 을불을 죽이려 했으나, 돌고는 낌새를 알아채고 을불을 도망치게 하고 대신 죽었다.

을불은 낙랑에서 숨어지내다 우연한 기회로 양운거, 소청(딸)의 도움으로 무예를 배우며 함께 지내게 된 사이인데, 소형은 흠모하던 방정균의 계략으로 스파이로 오해를 받으며 다시 고구려로 도망치게 되었다.

고구려로 돌아온 을불은 마을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지만 한 노인의 도움을 받아 신성의 저가를 소개받아 잡일을 하며 굼죽이며 지내고 있었는데 동명제에 나가 우승하면 지방 관직을 얻을수 있다는 얘기에 동명제에 나가 여노와 대적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봉상왕(상부)로 인해 일부로 져 주는 척하며 도망간다. 일부러 져 준 것이 기분 나빴던 여노는 봉상왕(상부)의 대면에서 이를 뿌리치고 을불을 쫓아갔고, 을불의 신분을 듣고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을불의 부탁으로 여노는 관리가 되어 고구려를 지킬 관병을 키우기로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봉상왕(상부)도 을불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온 백성이 알게 된다.

을불은 저가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약재 등과 철을 마련하기 위해 낙랑으로 다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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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한국 문화재 복원/보존 - 단청, 문화재 복원, 관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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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는 고려시대까지는 매우 찬란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중국의 억압때문에 왕이 사치를 못부리게 되니, 사대부 집안들도 맘껏 자기 맘대로 멋진 집을 짓거나 절을 지을 수 없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조선시대 건축, 예술, 도자기 등 많은 분야의 결과물들은 소박함이 묻어나고 단아한 멋이 있기는 커녕 "그저 그렇네~ 보통이네~"란 말만 듣기 쉽다. 실제로도 미국 메트로폴리탄 등 유명 박물관에서 중국, 일본관은 규모도 크고 사람들이 넘치는 반면, 한국관은 파리가 날리기 일쑤다!




 

비단 이것 뿐이랴?!


각국의 중요 관광지를 돌아다녀 보면 몇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수준낮은 역사 지식과 열악한 건축물 관리

 

한국 전통 건물에 문제점은 바로 단청을 너무 떡칠을 한다는데 있다. 오른쪽 단청은 아름다워 보이기는 커녕 과거 아줌마들이 하던 눈썹 문신처럼 촌스럽고 없어보기며, 심지어 딱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단청을 한국 모든 문화재에 적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신라, 백제, 고려까지 떡칠하고 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세계유산인 불국사도 조선시대 양식으로 떡칠되어 있다. 분명 신라시대 유물인데도 말이다!!!

 

저런 단청은 조선시대 것으로서 특히 연두빛 계열이 매우 촌스럽고 전문가적으로 봤을때도 색의 조화가 맞지 않아 분위기를 매우 수준 이하로 끌어내려 버린다. 심지어 이런 수준이하의 색감으로 떡칠된 단청이 조선 전통 왕가에서 쓰던 대표적 양식인지 아님 외딴 시골 절간에서 사용된던 것이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어떤 단청을 적용하느냐에 따른 단청의 전체적인 느낌의 차이는 아래 사진과 비교를 해봐서 확실한 분위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단청이 과하지 않게 들어간 경우




 

일본 교토 황궁에 금빛 문양의 건축물 (쿄토는 백제 영향을 많이 받은 곳)

 


삼국시대는 알록달록 단청보다는 적색 칠이나 황금 문양이 일반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문화재청은 저런 몰상식한 행정으로 촌스럽고 수준낮은 단청을 모든 문화재에 적용하고 있다.




 

더큰 문제는 저렇게 알록달록, 세밀한 문양이 들어가게 되면 한번 덫칠하는데 수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물감 개발을 해서 오래 유지되도록 하던지 1년은 커녕 6개월만 지나도 비바람에 벗겨지고 다시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과거 유명 관광지에 갈 때마다 단청은 대부분 벗겨지거나 그 빛깔을 잃고 있어 매우 우중충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강릉 선교장 안채와 담




 

백제 왕흥사를 모델로 지었다는 견해가 전해져 오고 있는 일본 아스카 사원


 

<위 사진참고>

조선시대 명문가의 집을 보더라도 단청이 칠해져 있기는 커녕 백제문화가 전해져 그대로 간진하고 있다는 일본 건축물과 같이 나무색, 흰색이 전부이다.

 

그러나 얼마전 부여에 백제 테마파크가 지어진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5층 목탑은 아래 사진과 같이 철저히 조선시대 단청으로 떡칠되어 있었다.

 

건축 스타일도 완전 조선시대 느낌이 강해서 완전히 경복궁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사실 경복궁 단청 자체도 정확하게 재현한건지 일반 시골 절간 단청을 한건지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백제 테마파크의 5층 목탑

 

법주사 5층 석탑 (신라)

 

지금이라도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시대 만큼은 시대에 맞게 문화재를 복원해야 한다.

 

심지어 조선시대 건축물이라 해도 모두 무조건 저런 촌스런 단청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관련자들의 확실한 개념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다.



 



2. 흙먼지 날리는 관광지

 

일본 관광지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깨끗함!!


걸을 때 상쾌함!!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바로 한국처럼 비만내려도 진흙탕이 되거나 바람불면 먼지가 휘날리는 흙먼지, 모래 대신 고급의 굵고 독특한 재질을 깔기 때문이다. (배수를 위해 땅 속 깊이 층층히 다른 재질로 처리)

 

과연 한국 왕가에서도 경복궁처럼 그런 흙먼지 날리는 그런 흙,모래를 바닥재로 썼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는 너무 심각하다.

 




 

게다가 그 울퉁 불퉁한 경복궁의 돌로 된 길재정비가 필요하다. 이건 국가적 망신이다. 아니 외국 관광객에게 적이 들어오면 빨리 못뛰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나 지껄이는 안내원은 또 뭐냐?? 참나...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너무 많다!

 

한국도 걷고 싶고 편안한 관광지를 만들려면...


1) 비법은 고급 재질을 효과적으로 까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배수, 침수 등 모든 상황 고려 필수)


2) 돌로 된 길은 비가 와도 침하가 되어 울퉁 불퉁하게 되지 않도록

전문적으로 다시 정비하여야 한다.

 

★ 결론 ★

 

한국 문화재 관리상의 여러 문제점이 많겠지만,


1. 시대별 단청, 건축 양식에 맞게 문화재를 복원


2. 먼지 날리는 문제 개선

위 두가지 만큼은 꼭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본 쿄토 황궁의 금빛 문양보다도

더욱 찬란했던 신라, 백제 문화재를 앞으로

잘 복원, 보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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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세워야 할 한국 역사: 정의와 자존심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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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현재 역사 정립이 제대로 안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우리가 분단도 되지 않고 조선시대 때 개방을 활짝 열어놓고 서양과 교류하면서 충분한 시간과 올바른 시각으로 역사를 정립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시대를 통해 한국 역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당장 한국은 역사 정립이 필요하다.

그전에 동아시아사가 유럽사 처럼 시대 흐름과 역사적 중요성을 포인트로 전체적으로 씌여져야 하며, 현재 중국, 일본 등 돈으로 마치 동아시아가 중국, 일본 역사만 있는듯 운영되어지는 각 학교의 지침은 수정되어져야 한다. 결국 유럽사처럼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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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황하문명과 고조선 등 북방 문화 -> 중국 통일 진나라 -> 고조선 후국 (고구려, 백제, 신라 등등) -> 북방 민족 (선비 등등) -> 고구려 승, 수 패망 -> 신라, 당의 연합으로 동아시아 판도 변화 -> 신라, 당 발전 -> 송, 고려 시대 -> 북방민족 거란의 등장 -> 몽골제국의 동아시아 정복 -> 조선, 명 시대 -> 일본의 적극적인 서양과의 홀로 교역 시작 -> 여진족과 일본의 등장 -> 임진왜란 -> 여진족 중국 정벌, 청의 등장 -> 조선, 청 쇄국 vs 일본 개방 -> 일본 제국주의 동참 ->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 일본의 패망 -> 조선, 청 독립 -> 북한, 남한 분리 -> 한국 전쟁

 

이를 적극적으로 세계에 책을 내고 홍보하고 관련 교수들과 협력하여 기본 마인드를 확실히 정해야 한다.

위 사항은 적극적으로 개선되어져야 하기에 본 글에 앞서 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일 전에 바로 한국 역사 정립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 다음 기사를 검색해 보면 종종 고구려가 통일 했어야 한다는 식의 얘기와 신라가 잘한 것이라는 등 여러 의견이 대립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역사인데 만약이란 말을 붙여놓고 무의미한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참고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23/2007102300031.html 다음에 등록된 같은 제목의 글을 보면 현재 한국인들의 생각들을 볼 수 있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먼저 한민족에 관련된 옛 대표 자료들을 먼저 열거하고자 한다.

 

1. 계승된 이름을 무엇을 의미하나?

 

(고)조선,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고구려의 일파 백제, (고)조선 유민이 세운 신라(물론 토착세력도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와 고려, 다시 (고)조선이란 이름을 사용한 조선!!




 

[생각해 볼 문제]

 

유럽사를 보더라도 원 이름이었던 나라를 바꾸는 경우는 없다. 로마 경우 로마제국이다. 그리고 동로마, 서로마라고 부른다. 즉 고조선이 조선이고 현 조선이라 불리는 조선이 후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을 한국 역사학자가 일제사관을 받아들여 부정하지만, 정작 중국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열국지" 중 한국편 42-4 쪽에 고대사-고조선 시기란에는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국가"라고 씌여 있으며, "고조선과 진국(辰國)이 멸망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주요 국가 3개가 출현했다”며 “이를 사서에선 ‘삼국’이라 부른다."고 전할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판면된 기자조선에 관한 내용을 싫지 않았다.

 

다만, 고조선이 2333년에 건립되었다는 주장을 입증되기 어렵다는 내용을 달았다. 또한 발해를 제외함으로써 북방민족이라는 틀을 만들고 한민족과 이간질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등 문제점은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문서가 증명하듯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피지배층에 여러 민족이 있었다 하나 좀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같은 류의 민족이었다. 발해 구성원 자체가 구분되어지는 건 중국 사서의 명칭 때문일뿐이다. 또한 "피지배층 중 다른 민족이 있었다"와 "피지배층이 모두 다른 민족이었다?"는 천지 차이이다. 게다가 모두가 피지배층인데 지배층 몇명만 고구려인이라는 상황 설정이 명백히 불가능하다. 수백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고구려 이후 그땅의 사람들 자체가 고구려인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한국의 고대사 왜곡을 주도한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상부 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의 출판물에서 동북공정의 내용과 무관하게 한국의 고대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즉, 고대사 중 고조선, 진국은 확실히 존재했던 국가였고, 그 국가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온 것이다. 알다시피,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온 다른 파이며,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고조선)의 유민으로 건립되었다고 적혀있다.

 

한민족은 역사 대대로 단군과 고조선을 시초로 생각해왔고 그랬기에 고조선 후국인 고구려를 줄인 고려가 나왔고, 현재의 고조선이 원래 조선이었는데, 다시 조선을 사용함으로서 옛조선이란 의미에서 고조선이 된 것이란 걸 확실히 알아야 한다.




 

▶ 그런데 한국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을 솔직히 신화로 보는 시각이 크며, 현재 해외에서도 강력하게 한나라로 보려는 시각을 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더이상 신화란 말로 스스로 역사를 오판하지 말고 확실한 사실을 한국내에서 인식하고 해외에 확실히 알려야 한다. (신화는 각 고구려, 백제, 신라 건국기에도 생긴 한국적 특징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 황하문명보다 진보했던 홍산문화라고 불리는 옛 고조선, 고구려 땅에서 발견된 문화가 동이족과 연관된 점이 많은데, 이를 오히려 자기네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첫 나라는 고조선"이라 말을 했다면 확실한 조사가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 ▷ http://cafe.naver.com/korea103.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71

http://cafe.naver.com/jsdorkr.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779

 

두번째 사이트는 현재 사라진 한국 역사 사서들이 일본 왕실 도서관에 있다는 내용.




 

2. 북방 민족 및 국가, 발해 이후 싹둑 잘리는 것이 바로 잘못된 일제사관!

 

말갈 = 여진족 (고려시대) = 만주족 (조선시대) ◀ 이들은 고구려, 발해의 구성원들, 또한 발해인들이 그곳에 남았을터.

 

왼쪽 그림은 한국의 일반 발해 지도, 오른쪽 러시아 자연사 박물관 (아르센에프)에 전시된 발해 지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한민족 역사 일부이므로, 발해 멸망후 여진족등 여러 다른 민족에 대한 연구를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 여진족은 수, 당 시대 말갈로 불렸으며 바로 고구려 백성이었다. 이들은 다시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불리지만 모두 같은 민족을 얘기하는 것이다. 솔직히 여진은 고려에 부모에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관계 나라를 요구했었다. 고려도 여진족이 귀화하면 아주 후하게 대접을 해 줬다고 한다. 그 말은 즉 역사적으로 그들 자신에게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연을 이어졌다고 봐야 한다. 또한 이들이 동족의식이 있던 없던 간에 여진을 발해 이후로 보던 말던간에 중요한 것은 최소한 유럽사처럼 표현한다면 이들은 같은 동족으로 표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방민족이 고려를 많이 괴롭힌 것은 사실이나,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은 없었다. (몽고족도 항복만 받아내고 고려를 존속케 했다. 이 때 역시 몽고족에게 사대관계를 맺은 것이었고, 중국은 식민지 상태였다.) 여진족은 형제관계를 또 요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중국을 식민지로 삼으며 청나라를 세우게 되기 직전 후금시대였다. 이때 조선은 명과의 관계 때문에 거절했었다. 게다가 더욱 아이러니 한것은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립하고는 조선을 없애버리면 그만인데, 병자호란을 일으키고는 사대관계를 요구한뒤 되돌아 간다. 이건 누가 봐도 찜찜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최소한 일본이었다면 일제시대처럼 처참히 나라의 왕이고 뭐고 근간을 없애 버렸을텐데, 청나라는 왜 가만히 두었는가? 그당시 청나라는 현재 중국이라고 볼 수 없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와 연고가 깊었던 북방 민족이 세웠던 나라였고, 조선은 현재 개념의 중국에 사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북방민족인 여진족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몽골제국 후 북방민족의 연결이 더욱 끊기게 된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즉, 남북을 재표하던 두 국가중 남쪽만 남은 결과를 낳았다.

 

여진족을 새롭게 조명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여진족 자신들의 성지를 백두산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진족은 너무나도 고조선, 고구려, 뱔해와 닮아 있다. 일제에 의해 잘려진 북방 민족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심각하게 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이들은 중국 역사와는 상관이 없다. 중국은 독립으로 비로소 오랜 북방민족의 식민지 시대를 끝냈을 뿐이었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 끝났는데 웬 일본 역사를 우리꺼라고 추가하나?? 중국식 논리는 말도 안된다. 단지 여진족의 나라가 현재 없을 뿐이고 중국 영토안에 포함 됐을 뿐 영토안에 모든 역사를 자기꺼라 하는 논리는 상당히 위험하다. 테두리 안에 두고 배우는 것과 모든 나라가 자신들인양 얘기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현재 발해 지역은 러시아 땅에도 속한다. 그래서 러시아도 발해를 배우지만 발해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짓을 절대 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은 심지어 몽골 식민지 시대도 원이란 이름으로 교묘히 바꿔 자신들의 수치적 사실을 자신업적인양 왜곡한다. 원이 아니라 그건 명확히 몽골제국이 갈린뒤 각 왕자가 집권한 동 몽골제국일 뿐이다.

 

다른 북방민족도 추가적으로 연구해서 유럽사적 동아시아사를 만드는데 활용해야 한다. 또한 북방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중국과 그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처럼 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의 오류를 없애고 바로 잡아야 한다.

 

1) 고조선의 연대가 불분명한 것일뿐 분명 고조선은 존재했다. 이 둘을 헷갈리지 않기를 바란다.

2) 고조선은 근간으로 한 국가들은 모두 같은 동족, 같은 계의 사람들이었다. 또한, 고려, 조선에서 보듯 통일 신라를 통해 (고조선 때 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찌 되었건 명목상으로 실질적으로 하나로 합쳐졌다. 발해, 통일신라 시대를 이렇게 보는 시각이 옳다. 발해 멸망후 고려는 다시 한번 발해 민족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다시 합쳐졌다. 하지만 절대 상당수가 그대로 남아진 북방민족을 다시 이해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3) 발해 이후 싹뚝 잘려 버린 북방민족이란 시각을 재 조명해야 한다.

3) 유럽사처럼 동아시아 역사를 다룰때, 종족의 설명을 연구하여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4) 현재 잘못 알려진 자료들을 새로 고쳐 바꾸고 홍보해야 한다.




 

아래는 잘못된 지도를 버젓이 올려놓은 사이트.

A. 다음 몽골제국 설명 과정에서 고려가 존속했음에도 불구, 몽골제국 영역 안에 두었다. (위키피디아 그대로 홍보)

B. 위키피디아 한국 사이트에서도 몽골제국 영역에 고려를 넣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7%B8%EB%A6%BC:Mongol_Empire_map.gif

http://ko.wikipedia.org/wiki/%EA%B7%B8%EB%A6%BC:Mongol_dominions.jpg

C. 미국 위키피디아에서도 동일 오류지도 발견

http://en.wikipedia.org/wiki/Mongol_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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