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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은 거짓말! '만주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 청나라 #만주원류고 #만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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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1912년에 망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유럽보다도 다양한 나라들이 존재했던 지역이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과거부터 중국에는 이민족이 세운 나라가 많았는데, 북위, 요, 금, 원, 청나라 등이 바로 이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지금의 중국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당시 이민족들이 독자적으로 그 땅에 나라를 세우고 운영하고 있었다. 과거에 그 나라가 존재했을 뿐이었고, 이것이 식민지 또는 지배 형태였는지, 자신들이 세운 나라인지만이 중요한 것이다.

 

가장 중국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나라인 원나라도 결국 몽골이 지배한 것이었고, 이후 독립을 한 것이었다.

 

당연히 청나라는 만주족이 지배한 것이었다.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망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고서가 있는데 바로 ' 만주원류고 '이다.  당시 청나라 지배층인 만주족의 생각이 고스란히 이 '만주원류고'에 씌여 있는데, 솔직히 많이 놀라운 내용들이 많이 씌여져 있다. 지금의 중국인 즉 지배를 받던 한족 등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그 만주족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 만주족의 생각 = 만주원류고

 

추측했던 것처럼 만주족을 포함한 만주 지방의 민족들은 고구려의 후예로 한국과 같은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만주족은 한국 고대 구성원에서 나와 발전된 민족이었다.

 

먼저 ' 흠정만주원류고'는 한족 중심이 아닌 만주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편찬이 되었다. 즉, 지금의 대다수의 중국인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만주족은 소멸)

 

부여, 고려, 삼한, 백제, 신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발해, 여진(건주, 완안)

 

이 나라들이 모두 이 책에서 만주족의 계통과 기원으로 포함되었다. 부여 다음에 씌여진 고려는 '고구려'로 보인다.

 

즉, 만주족들은 한족들과 다르게 그들의 뿌리를 한반도와 만주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 그 지역은 텅 비었다는 것이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렇게 그 지역은 존재했던 것이었다. 특히 신라, 고려 인물을 금나라의 시조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묘한 느낌을 받는다. 신라와 고구려를 동급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현재 이 책에는 한국의 역사도 많이 포함되어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조선이 끝까지 명과의 관계를 고집하다가 결국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했었다. 여기서 중요한건 후금이 왜 형제의 관계를 바랬느냐였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 만주원류고'를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후로도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군신의 예를 요청하였다.

 

청나라가 망했더라도, '왜' 만주족의 나라는 없어졌을까?
만주족은 현재 천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만주족들의 역사의식은 대부분 소멸되었다고 보여진다.

 

만주족은 그 만주어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들의 나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많다.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영국 옆의 아일랜드나 발트3국 등을 보면, 유럽은 언어가 같거나 인구가 작아도 그 존재를 인정해 주고 있다. 하지만, 중국 지역은 유럽처럼 어떤 선과 유대, 인간성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강자가 독식하는 그런 느낌? 상당히 고대국가 분위기에 머물러 있다.

 

어째되었든, 강력한 중국어와 인구를 무기로 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결과적으로는 그 이민족의 강한 역사의식마저도 없어지게 만들었지만, 그랬다고 그 이민족의 역사가 그들의 것은 아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다. 미국에 중국인들이 많이 이민갔다고해서 미국이 중국은 아니다.

 

만주원류고의 역사의식을 가진 만주족이 존재할까?
다행히도 역사적으로 참고할 사료가 남았다.

 

현재 이 책은 중국에서 철저히 외면을 하고 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높다. 당시 청나라를 이끌던 지배층인 만주족이 만든 역사책이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전 세계가 공유하고 연구해야 하며, 특히 한국 역사 관련자들은 이책을 기반으로 역사를 다시 바꿀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온 내용을 보면 매우 중요한 역사 기록이 하나 나온다. 항상 궁금했던 신라와 백제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길림성과 요령성 등 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백제의 22담로도 해결되고, 각종 중국 역사서에서 중국의 과거 나라들이 백제, 신라와 싸웠다는 전쟁기록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지배층 만주족은 한족을 대학살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청나라 지배층인 만주족들은 한족을 매우 전략적으로 학살하고 차별했다. 그 대학살은 매우 심각했으며, 지배층이 중국 한족을 경멸해서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시행되었다고 한다. 만주족은 한족을 극도로 경멸하고 싫어했던 것이었다. 한족은 모두 변발을 해야 했고, 변발을 하지 않으면 모두 몰살되는 강도높은 지배 정책이었다.

 

이러고도, 청나라가 중국의 역사라 할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중국이라는 지역은 이민족에게 1616년부터 1912년까지 296년동안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을 뿐이었다. 

 

유럽의 경우는, 그 민족이 흡수되어 사라지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작은 민족은 그렇다 할수 있지만, 만주족은 작은 민족은 아니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유럽의 여러 민족은 그들만의 나라를 만들고,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계속 현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만주족이 그 정체성과 언어와 나라 마저 사라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어쨌든 만주족은 청나라가 망하고 (지배가 끝나고) 만주지역에서조차 청나라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만주족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민족의식은 온데간데 없고, 민족도 만주족인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연히 국적은 중국이겠지!! 조상이 들으면 아마 대노할 것이다.) 자신들의 시조도 모르고, 그 민족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는 민족은 더이상 만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만주족도 (정체성도) 소멸해버린 것일까?

 

결론은 한국과 같은 뿌리를 두었다고 생각한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웠다.
현재 중국에 흡수가 된 상황이라지만, 그랬다고 이민족으로써 지배했던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세계 모든 역사가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책과 역사지도를 만들고 있다.
로마제국이 그러하고, 몽골제국이 그러하다.

 

심지어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은 당시의 상황일뿐 이탈리아가 아니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과거에 그런 것을 현재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몽골이 '중국이 내 땅이다.'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

 

한국이 일제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다고 독립을 했던건, 역사의식, 민족의식과 언어 그리고 확실한 국민들의 마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나'의 정체성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주장처럼 한국인들이 지배했던 일본은 우리꺼다라고 하는 정신병자는 없을 것이다.

 

청나라가 딱 그런 상황인 것이다. 중국은 청나라를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지역을 점령의 형태로 꾸려온 중국의 관리 방식에서는 더더욱이 중국과 청나라를 같다고 볼 수가 없다. 지배를 받았던, 중국의 한족이 있었고, 그들은 지배에서 벗어난 것 뿐이다. 청나라가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동북공정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오랑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 다른 언어, 다른 역사의식으로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추후 금나라의 노예가 되어, 똑같이 당했을 뿐이고, 청나라 지배기간은 끝났을 뿐이었다.

 

동북공정의 아이러니는 바로 지배층인 만주족이 남긴 정체성 혼란으로도 보여지는데, 현재의 만주족이 스스로 중국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역사는 당시의 역사관과 지배층의 생각이 제일 중요하며, 아무리 역사를 바꾸려고 해도 역사의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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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의 민낯, 용어 정리도 안된 사실들 (명성왕후 vs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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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명성황후가 한동한 극찬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아픔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계속 성곡적으로 공연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명성황후(황제의 정실부인)라고 말하는 것에는 꺼리낌이 없는 반면 같은 시대의 명칭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종 vs 명성황후

역사 책 속에 엉망진창의 용어 표기... 식민사관의 연속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현재 한국 역사계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완의 것으로 낮추지만, 비록 망했더라도 대한제국이라 선포한 이상 더이상 조선은 아닌 것입니다.

중국도 아주 잠깐 존재했다 사라진 신나라도 중국 역사책에서 절대 빠지지 않죠.

문제는 한국 내에서 명성황후가 우세하게 불리고 있는 반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어야 할 황제는 조선의 고종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역사책에는 광무제(고종)는 조선 왕조 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한국 역사계가 정리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비록 광무제(고종)의 꿈이 짧았다고는 하나 결코 조선이 될 수 없습니다. 역사책에도 조선과 대한제국을 나눠야 하며 조선 왕의 계보와 대한제국 황제의 계보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멍청한 기자가 자신의 기사 내용에 명성황후는 광무제(고종)가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1897년 10월 이전에 죽었으니 추전된 명칭을 쓸 수 없다고 하는데 매우 논리다 빈약한 생각입니다.

광무제(고종)이 황제가 되는 순간 명성왕후도 명성황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대로라면 흥선대원군도 황제국의 표현인 흥선대원왕으로 부르면 될 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철종을 철종이라고 부를지, 장황제라고 부를지 헷갈린다면 정말 무능한, 지식이 모자란 기레기을 인증하는 것입니다.

광무제(고종)가 황제가 되어 전 왕을 장황제로 추대했다고 하면 끝날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광무제(고종) 표기가 맞는 표기이며, 전 왕도 아닌 정실부인을 일컫는데 사망한 연도 계산은 의미가 없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되자 아내가 왕후가 된것처럼 광무제(고종)가 황제가 되면서 명성왕후도 황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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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계보 -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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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망한 것은 어찌보면, 원나라에게 간섭을 당함으로써 왕의 권한이 하늘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화도로 진군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회군해서 왕을 없애고 자신이 왕이되어 나라를 만드는 역사를.. 글쎄요.. 과연 세계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성계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군졸들의 충성을 요구하고도 왕에게는 그 충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원나라에게 굽신대던 왕의 위치가 처참하기도 했으나 왕이 신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도 문제긴 했습니다.

게다가 고려 백성들은 왕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원성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왕은 위화도로 진군하기 전에 백성들을 먼저 세심히 살폈어야 했고, 자신보다 백성이 신임하는! 이성계보다는 젊고 자신의 명령을 대꾸없이 따라줄 인사를 먼저 단행했어야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술이고 능력이고 처세술이고 경영이고 능력인데, 문제가 많았던 왕들은 이런 것 하나 없이 그저 다 그 권한과 특권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명령만 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아니면 유럽처럼 강력한 신뢰할 만한 전문가 그룹과 귀족들을 주변에 많이 만들어 놓던지 했었어야죠~ 유럽은 보통 왕의 친인척, 형제 자매가 나라가 되어 힘을 합치는데, 한국의 역사 속에서는 죽이거나, 살려둔 형제들이 다시 왕이 되는 등, 신뢰가 땅에 무너지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됐는지도 분석해봐야 합니다.

게다가 고려 후기는 중세시대로 백성들은, 사회 시스템은 더이상의 단순한 왕권보다는 어진 임금, 임금다운 임금이 필수조건이 되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아무튼 조선의 경우는, 왕을 없애고 신하 스스로 자신이 왕이 되었고, 이런 싸구려 왕권은 국민들과 신하들에게는 그다지 충성할 거리가 안되는 법이죠. 한마디로 “지가 뭔데?” “너가 왜?” 이런 비난은 오래 오래 갈테고, 신하들도 겉으로 모시는 척만 할 뿐이죠. 대의명분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왕의 권위가 그만큼 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왕은 더 큰 힘을 기대기 위해 명나라, 청나라에게 빌붙는 것입니다. 나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더 강력한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런 비이상적인 구조는 사회의 이상을 증폭시키고, 비리와 부패를 판치게 하며, 정의와 번영의 나라보다는 기회주의나 생계가 급급한 각박한 사회를 만듭니다.

유럽은 똑똑한 머리로 능력자와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지금도 찬란한 건축, 예술, 문화를 남겼지만, 조선은 불타면 사라져버릴 그런 위대하지만 위태위태한 길을 걷다가 결국 처참하게 사라졌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과연 현재 한국은 아름답습니까? 유럽보다 살기 좋습니까?

아직 다른 선진국을 더 들여다봐야 할 때이고 벤치마킹을 하고 배울 것들이 있는 시기입니다.

과거 이성계 사진과 나폴레옹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시대는 다르지만, 무언가 자세나 그림이나 여러면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림은 유럽의 경우 과거부터 기술력이 뛰어났습니다.

한국은 아직 발전해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자와 뛰어난 자가 자꾸 정치계에 나와줘야지, 무식하고,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나오면 안됩니다. 이를 막을 방법을 연구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이 멈추면 안됩니다.

혼란한 시기에 세워진 대한민국과 관련 법들...

다시한번 보다 나은 시대를 위한 준비를 지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1대 태조
1392-1398
이성계, 조선의 제 1대왕

2대 정종
1398-1400
1대 태조의 둘째 아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

3대 태종
1400-1418
1대 태조의 다섯째 아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고 관직 제도를 개혁함.

4대 세종
1418-1450
3대 태종의 셋째 아들. 훈민정음을 창제함.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켜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 성군.

5대 문종
1450-1452
4대 세종의 맏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한 왕.

6대 단종
1452-1455
5대 문종의 아들. 정치적 야심에 희생된 비운의 소년 국왕.

7대 세조
1455-1468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수양대군).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

8대 예종
1468-1469
7대 세조의 둘째 아들. 재위 13개월 만에 죽음.

9대 성종
1469-1494
7대 세조의 손자.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함.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음.

10대 연산군
1494-1506
9대 성종의 맏아들이자 폐비 윤씨의 아들.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됨.

11대 중종
1506-1544
제9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관련어: 조광조, 기묘사화

12대 인종
1544-1545
11대 중종의 맏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었던 왕, 재위 8개월만에 사망함.

13대 명종
1545-1567
11대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 관련사건: 을사사화

14대 선조
1567-1608
11대 중종의 손자. 당쟁과 왜군의 침입에 휩싸인 왕.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해짐. 붕당 형성.

15대 광해군
1608-1623
14대 선조의 둘째 아들. 조선 중기의 격동기에 실리외교를 택한 군주. 대동법을 실시함.

16대 인조
1623-1649
14대 선조의 손자.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왕.

17대 효종
1649-1659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으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는 못함.

18대 현종
1659-1674
17대 효종의 아들. 남인과 서인의 당쟁(예송논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짐.

19대 숙종
1674-1720
18대 현종의 아들.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함. 당쟁과 궁중암투가 극에 달함. 관련인물: 인현왕후, 희빈 장씨, 숙빈 최씨

20대 경종
1720-1724
19대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

21대 영조
1724-1776
19대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붕당 대립을 완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함.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임.

22대 정조
1776-1800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탕평책을 계승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함.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됨.

23대 순조
1800-1834
22대 정조의 둘째 아들. 11세에 즉위. 김조순 등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던 시대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 발생함.

24대 헌종
1834-1849
23대 순조의 손자. 8세에 즉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림.

25대 철종
1849-1863
22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1844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9세 나이로 즉위.

26대 고종
1863-1907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27대 를 조선 마지막 왕이라며 넣는데, 어불성설. 뜻도 모르는 무식한 역사학자의 농간이죠. 조선의 마지막 왕은 26대 고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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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 계보 - 흘러간 10년 세월과 문무관 차별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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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발해 시대가 끝나고 고구려를 표방하는 고려가 들어선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지만, 시기적으로 고려는 발해가 망할 즈음에 북진을 했어야 했지만, 북진 정책이 너무나도 많이 느렸습니다.

발해가 926년까지 유지를 하였으므로 초기부터 신라, 백제보다는 발해를 염두에 뒀어야 했지만, 신라는 한참 뒤인 935년까지 유지됐으므로 약 10년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좋은 시기를 놓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 발해가 활동하던 만주 지방을 모조리 거란족, 여진족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일각에서는 고려가 고구려 이름을 씀으로써 여진족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갈로 불리던 여진족은 고구려의 구성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해가 망한 자리에 그대로 그곳에셔 나라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태조 918년부터 문종 1083년까지 165년간 동안 중앙집권적 국가기반과 귀족정치의 최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 1백년간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고, 그 뒤 다시 1백년간의 원나라 간섭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종종 세계지도에는 고려가 원나라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되는데, 간섭기가 맞으며 왕은 유지됐고, 100% 조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국시대도 아니고 중세로 여겨지는 고려사회는 의식 자체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회의 문·무반 차별 대우로 인해 무신정변이 발생했으며, 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을텐데 사회 불난은 증폭됐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대요.. 몽골족은 지도자의 충성을 맹세하며 전세계를 날뛰고 있었을때, 한반도는 해묵은 차별로 서로 싸우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당한 것이구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결국 왕은 폐위되고, 무신이 왕이 되어 나라를 이끄는 양상이 된 것이었고, 원나라 간섭으로 인해 이런 왕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1백년 연장된 것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이런 고려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에 대한 반역이었고, 왕의 권위가 고려 사회에서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려 왕조는 무신정권으로 한번, 원나라 간섭으로 두번, 이성계로 인해 세번이나 유린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1대 태조
918-943
왕건, 고려의 시조. 북진정책,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포섭함(왕권 안정).

2대 혜종
943-945
1대 태조 왕건의 맏아들.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에 시달림.

3대 정종
945-949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함. 재위기간은 4년.

4대 광종
949-975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함.

5대 경종
975-981
4대 광종의 맏아들. 976년 전시과 제정, 6년간 재위함.

6대 성종
981-997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최승로의 시무28조 수용),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세운 왕.

7대 목종
997-1009
5대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함.

8대 현종
1009-1031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6천여권)을 제작함. 관련사건: 강감찬의 귀주대첩.

9대 덕종
1031-1034
8대 현종의 맏아들. 국자감시를 실시함.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함.

10대 정종
1034-1046
8대 현종의 둘째 아들.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함.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함.

11대 문종
1046-1083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

12대 순종
1083-1083
11대 문종의 맏아들. 재위 3개월만에 죽음.

13대 선종
1083-1094
11대 문종의 둘째 아들.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임.

14대 헌종
1094-1095
13대 선종의 맏아들.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줌.

15대 숙종
1095-1105
11대 문종의 셋째 아들.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함.

16대 예종
1105-1122
15대 숙종의 맏아들.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재단 설립하는 등 학문 진흥에 힘씀.

17대 인종
1122-1146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 관련사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18대 의종
1146-1170
17대 인종의 맏아들.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폐위됨.

19대 명종
1170-1197
17대 인종의 셋째 아들. 정권을 장악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0대 신종
1197-1204
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만적의 난 등 민란이 잇달아 일어남.

21대 희종
1204-1211
20대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됨.

22대 강종
1211-1213
19대 명종의 맏아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겨 강화도로 갔다가 1211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름.

23대 고종
1213-1259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함.

24대 원종
1259-1274
23대 고종의 맏아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에게 폐위(1269), 4개월 만에 복위함. 개경환도(1270) 후,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항쟁 일어남.

25대 충렬왕
1274-1298, 1298-1308
24대 원종의 맏아들. 고려왕이면서, 원나라의 사위로 살아간 왕.

26대 충선왕
1298-1298, 1308-1313
25대 충렬왕의 아들.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27대 충숙왕
1313-1330, 1332-1339
26대 충선왕의 둘째 아들. 심양왕 고(충선왕의 조카)와의 정권다툼에 시달림.

28대 충혜왕
1330-1332, 1339-1344
27대 충숙왕의 맏아들. 방탕한 행동으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됨.

29대 충목왕
1344-1348
28대 충혜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해 12세에 죽음.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함.

30대 충정왕
1349-1351
28대 충혜왕의 서자. 12세에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3년만에 폐위됨.

31대 공민왕
1351-1374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공민왕 시해로 개혁 중단됨.

32대 우왕
1374-1388
공민왕이 시해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됨.

33대 창왕
1388-1389
32대 우왕의 아들. 9세에 즉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34대 공양왕
1389-1392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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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왕 계보 - 상천용천부로 옮기면서 고구려 색이 흐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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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약 228년 동안 한반도 북방과 만주지역을 지배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건재했으나, 갑자기 어떤 이유도 없이 나라가 사라진 신기한 경우입니다. 그 이유도 그 단서도 없어서 백두산에 터지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는 듯한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4대 대원의 왕이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대원의는 왕의 직계가 아니었으나 문왕의 아들 광림이 일찍 사망하였고, 광림의 아들 대화여는 나이가 무척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다가 1년도 안되어 죽임을 당했다.

결국 나라의 기틀인 왕가가 기초부터 흔들리는 것은 바로 56이나 다스리는 동안 행여 태자가 잘못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지혜로운 유언을 만들어 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한번 꼬인 왕가는 계속 꼬이기 시작했다.

다시 광림의 아들 대화여가 성왕이 되었으나 1년만에 병사하여 문왕의 막내아들인 대숭린이 강왕에 올랐다.

15년 후, 강왕의 아들 원유가 정왕으로 올랐으나 3년만의 사망하여 또다시 정왕의 동생 언의가 희왕으로 올랐으나 5년만의 희왕의 동생 대명충이 간왕에 올랐다.

즉, 정리하면 3대 문왕이 왕가를 튼튼히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793년부터 818년까지 25년간 7번의 왕이 교체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어지러운 기간에 1년만에 병사한 성왕은 수도를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이전하였다. 황당한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이 두 지역은 거리가 서로 매우 먼 거리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왕이 자주 바뀌는 상황이고 기틀도 못잡은 주제에 상경용천부 지역은 거란과 말갈과 당에서 각각 매우 가까운 지역인데 그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멍청한 처사였다.

오히려 신라와 관계를 회복하고 내부 기틀을 다지는 것이 맞았다.

다시 괜찮을 것 같은 왕위계승은 또한번 형제 계승됨으로써 무언가 왕위계승의 문제점을 또는 권력을 가진 지배층과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예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위에서 지적했던 상경용천부 수도 이전은 “거란에게 나 좀 잡아먹어 주시오”를 외치는 격이었다.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태조)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 발해의 부여부를 점령하고 다음해 수도 홀한성을 공격하자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거란에 항복하고 말았다. 가 큰 땅을 가진 발해가 망했다고 해서 한반도 북부나 기타 지역에 고구려를 잇는 나라가 등장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억울한 일이다.

이렇게 발해는 허망하게 망한다.

일부는 여진족이 고구려의 후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만주족 자체가 고구려 국민이었으므로 틀리다라고 말하기는 또 어려울 것 같다.


1대 고왕
698-719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2대 무왕
719-737
1대 고왕 대조영의 아들. 중국 당나라와 대립함.

3대 문왕
737-793
2대 무왕의 아들. 당과 친선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임.

4대 대원의
793-793
즉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함.

5대 성왕
793-794
3대 문왕의 손자

6대 강왕
794-809
3대 문왕의 막내아들

7대 정왕
809-812
6대 강왕의 아들

8대 희왕
812-817
6대 강왕의 아들이자 정왕의 동생

9대 간왕
817-818
6대 강왕의 아들이자 정왕/희왕의 동생

10대 선왕
818-830
1대 고왕의 동생인 대야발의 4대손. 발해를 중흥시킨 군주로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음.

11대 대이진
830-857
10대 선왕의 손자

12대 대건황
857-871
11대 대이진의 동생

13대 대현석
871-894
12대 대건황의 아들

14대 대위해
894-906

15대 대인선
906-926
발해의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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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 계보 - 반쪽짜리 통일, 부끄러운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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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한국 역사에서 특히 왜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은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가 다스리는 왜 지역 사람들을 이용해서 신라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제는 한번이라도 확실하게 신라를 무너뜨린 적이 없었고 결국 신라-당 연합에 패했고, 지도층은 한반도에서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를 다 차지하지 못한채 반쪽짜리 통일을 이뤘고, 고구려 지역에는 발해가 들어서는데, 발해도 후에 특별한 이유없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고, 북방 지역은 여진족, 거란족, 만주족 등의 주거지가 되어 버렸으나, 이 민족들도 고구려와 연관이 크다는 얘기가 많이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고려, 조선과 형제의 나라란 표현을 많이 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은 그들을 끌어안을 전략도 생각도 없었다.


1대 혁거세 거서간
B.C. 57 - A.D. 4
신라 최초의 왕, 박씨의 시조

2대 남해차차웅
4 - 24
1대 혁거세의 맏아들(박씨)

3대 유리이사금
24 - 57
2대 남해차차웅의 아들(박씨).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4대 탈해이사금
57 - 80
2대 남해차차웅의 사위(석씨). 왜국의 다파나국 출신으로 석씨의 시조.

5대 파사이사금
80 - 112
3대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박씨)

6대 지마이사금
112 - 134
5대 파사이사금의 아들(박씨)

7대 일성이사금
134 - 154
3대 유리이사금의 맏아들(박씨) 혹은 일지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함.(삼국사기 기록)

8대 아달라이사금
154 - 184
7대 일성이사금의 맏아들(박씨). 왕비는 지마왕의 딸.

9대 벌휴이사금
184 - 196
4대 탈해이사금의 손자(석씨)

10대 내해이사금
196 - 230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석씨)

11대 조분이사금
230 - 247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이자 내해왕의 사촌(석씨). 왕비는 내해왕의 딸.

12대 첨해이사금
247 - 261
9대 벌휴이사금의 손자이자 조분왕의 친동생(석씨)

13대 미추이사금
262 - 284
김알지의 7대손(김씨).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으로 조분왕의 딸.

14대 유례이사금
284 - 298
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석씨)

15대 기림이사금
298 - 310
11대 조분이사금의 아들·손자·증손이라는 여러 설이 있음.

16대 흘해이사금
310 - 356
10대 내해이사금의 손자이자 제11대 조분이사금의 외손자.

17대 내물마립간
356 - 402
김씨에 의한 왕위독점세습 이룸. 왕권 강화되어 대군장 뜻하는 ‘마립간’ 왕호를 사용함(왕호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름).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함. 고구려 광개토대왕 도움으로 왜군 격퇴함.

18대 실성마립간
402 - 417
김알지의 후손(김씨). 왕비는 제13대 미추이사금의 딸. 내물마립간의 태자인 눌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함. 왕호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름.

19대 눌지마립간
417 - 458
17대 내물마립간의 아들(김씨).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장자상속제를 확립함. 433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함(나제동맹).

20대 자비마립간
458 - 479
19대 눌지마립간의 맏아들(김씨). 왜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림.

21대 소지마립간
479 - 500
20대 자비마립간의 아들(김씨). 백제·가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침.

22대 지증왕
500 - 514
17대 내물마립간의 증손. 503년 나라이름을 '신라'로, 왕호를 '왕'으로 바꾸며 왕권을 강화함. 순장법을 폐지하고 울릉도 우산국을 정복함.

23대 법흥왕
514 - 540
22대 지증왕의 맏아들. 율령 반포, 불교 공인(백성의 사상 통합), 골품제 정비, 상대등 설치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함. 금관가야 병합.

24대 진흥왕
540 - 576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공인하고, 황룡사 건립하여 신라의 국력 과시. 한강 유역 모두 장악, 대가야 병합, 함흥평야 진출 등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함(진흥왕 순수비).

25대 진지왕
576 - 579
24대 진흥왕의 둘째 아들.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국정을 맡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위 4년만에 폐위됨.

26대 진평왕
579 - 632
24대 진흥왕의 손자. 행정조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

27대 선덕여왕
632 - 647
26대 진평왕의 맏딸이자 신라 최초의 여왕.

28대 진덕여왕
647 - 654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강화함.

29대 태종무열왕
654 - 661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폐위된 진지왕의 손자).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짐.

30대 문무왕
661 - 681
29대 무열왕의 맏아들. 삼국 통일을 이루어 낸 왕.

31대 신문왕
681 - 692
30대 문무왕의 맏아들.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

32대 효소왕
692 - 702
31대 신문왕의 맏아들.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

33대 성덕왕
702 - 737
31대 신문왕의 둘째 아들. 신라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한 시기로 평가됨. 당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

34대 효성왕
737 - 742
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됨.

35대 경덕왕
742 - 765
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 전제왕권 재강화를 위해 노력함.

36대 혜공왕
765 - 780
35대 경덕왕의 아들(태종무열왕의 마지막 직계손). 8세에 즉위,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적 반란사건이 많았음.

37대 선덕왕
780 - 785
17대 내물왕의 10대손. 신라 하대(下代)의 첫 번째 왕.

38대 원성왕
785 - 798
17대 내물왕의 12대손. 788년, 독서 삼품과를 실시함.

39대 소성왕
799 - 800
38대 원성왕의 손자

40대 애장왕
800 - 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 13세에 즉위함. 숙부들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시해됨.

41대 헌덕왕
809 - 826
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소성왕의 친동생.

42대 흥덕왕
826 - 836
38대 원성왕의 손자이자 소성왕/헌덕왕의 친동생.

43대 희강왕
836 - 838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

44대 민애왕
838 - 839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

45대 신무왕
839 - 839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이며, 제43대 희강왕의 사촌임. (관련인물 : 장보고)

46대 문성왕
839 - 857
45대 신무왕의 맏아들

47대 헌안왕
857 - 861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

48대 경문왕
861 - 875
43대 희강왕의 손자이자 제47대 헌안왕의 사위

49대 헌강왕
875 - 886
48대 경문왕의 맏아들

50대 정강왕
886 - 887
48대 경문왕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여왕
887 - 897
48대 경문왕의 딸로 신라시대 마지막 여왕

52대 효공왕
897 - 912
49대 헌강왕의 서자.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림.

53대 신덕왕
912 - 917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박씨). 916년 견훤에게 대야성을 공격당함.

54대 경명왕
917 - 924
53대 신덕왕의 아들(박씨). 신라 국력이 크게 쇠퇴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만 다스리게 됨.

55대 경애왕
924 - 927
54대 경명왕의 동생(박씨).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

56대 경순왕
927 - 935
신라의 마지막 왕(김씨),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름. 경순왕 9년에 자진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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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 계보 - 자신감이 부족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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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시작은 고구려였다.

분열도 한나라였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옆 나라를 이용하려 했다. 삼국의 공통 사항은 옆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상대국이 결국 업신여기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 옆나라를 이용하려는 것은 그 때도 지금도 자신들의 국운을 애처롭게 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백제는 주변을 이용하지 말고 스스로 강해지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고구려, 신라 등 주변국과의 동맹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동맹국에게 당하는 꼴이 되었다.



1대 온조왕
B.C. 18-A.D. 28
고구려의 셋째 왕자인 온조, 백제를 세우다

2대 다루왕
28-77
1대 온조왕의 맏아들

3대 기루왕
77-128
2대 다루왕의 맏아들

4대 개루왕
128-166
3대 기루왕의 맏아들

5대 초고왕
166-214
4대 개루왕의 맏아들

6대 구수왕
214-234
5대 초고왕의 맏아들

7대 사반왕
234-234
6대 구수왕의 맏아들. 나이가 어려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여 곧 폐위됨.

8대 고이왕
234-286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삼국사기 기록).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 유역을 차지함. 율령 반포, 관리 등급 마련(6좌평) 등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9대 책계왕
286-298
8대 고이왕의 맏아들

10대 분서왕
298-304
9대 책계왕의 맏아들. 분서왕 7년에 낙랑의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됨.

11대 비류왕
304-344
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삼국사기 기록)

12대 계왕
344-346
10대 분서왕의 맏아들. 고이왕계의 마지막 백제왕.

13대 근초고왕
346-375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함.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 시킴. 가야/왜와는 교류하는 반면 고구려/신라는 견제함.

14대 근구수왕
375-384
13대 근초고왕의 맏아들

15대 침류왕
384-385
14대 근구수왕의 맏아들. 불교를 수용하여 백성의 사상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함.

16대 진사왕
385-392
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 392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패하여 많은 영토를 잃음.

17대 아신왕
392-405
15대 침류왕의 맏아들. 396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크게 패함.

18대 전지왕
405-420
17대 아신왕의 맏아들. 상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을 처음 설치함.

19대 구이신왕
420-427
18대 전지왕의 맏아들.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음.

20대 비유왕
427-455
19대 구이신왕의 맏아들(제18대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음).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 왜, 중국 송나라 등과 우호관계를 형성함.

21대 개로왕
455-475
20대 비유왕의 맏아들.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유역 일대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음.

22대 문주왕
475-477
21대 개로왕의 맏아들. 웅진으로 도읍을 옮김.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목숨을 잃음.

23대 삼근왕
477-479
22대 문주왕의 맏아들.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 15세에 죽음.

24대 동성왕
479-501
22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 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 남진정책에 대항함. 신진 세력 등용.

25대 무령왕
501-523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 고구려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백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쓴 왕.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

26대 성왕
523-554
25대 무령왕의 아들.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 부흥을 이끈 왕. 554년 신라 진흥왕과의 격전에서 전사함. 이로써 나제동맹관계는 결렬됨.

27대 위덕왕
554-598
26대 성왕의 맏아들

28대 혜왕
598-599
26대 성왕의 둘째 아들. 즉위하고 이듬해에 죽음.

29대 법왕
599-600
28대 혜왕의 맏아들(삼국사기 기록). 즉위하고 이듬해에 죽음.

30대 무왕
600-641
29대 법왕의 아들. [삼국유사]에 무왕과 관련된 서동설화가 전해짐.

31대 의자왕
641-660
30대 무왕의 맏아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초기에는 대야성전투 등 신라에 적극적 공세를 취함.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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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태황 왕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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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동명성왕
B.C. 37 - B.C. 19
고구려의 시조

2대 유리왕
B.C. 19 - A.D. 18
1대 동명성왕의 맏아들. 유리왕 22년,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김.

3대 대무신왕
18-44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기록되어 있음.

4대 민중왕
44-48
3대 대무신왕의 동생(삼국사기 기록)

5대 모본왕
48-53
3대 대무신왕의 맏아들.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음.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6대 태조왕
53-146
2대 유리왕의 손자. 옥저 정복.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를 완성함(왕위세습확립).

7대 차대왕
146-165
6대 태조왕의 동생. 왕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음. 차대왕 20년에 명림답부에게 살해됨.

8대 신대왕
165-179
6대 태조왕의 막내동생. 77세에 즉위함.

9대 고국천왕
179-197
8대 신대왕의 둘째 아들.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함. 을파소를 등용함.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구휼책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나감.

10대 산상왕
197-227
9대 고국천왕의 동생.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김

11대 동천왕
227-248
10대 산상왕의 아들.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었으나, 위기를 극복함.

12대 중천왕
248-270
11대 동천왕의 맏아들

13대 서천왕
270-292
12대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와 소발을 처단함.

14대 봉상왕
292-300
13대 서천왕의 아들. 동생 돌고(미천왕의 아버지)를 죽임. 계속된 흉년에도 화려한 궁실을 지으려 함. 결국 국상 창조리에 의해 폐위됨.

김진명이 집필한 고구려에서는 달가라는 안국군(서천왕 아우)도 봉상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15대 미천왕
300-331
13대 서천왕의 손자. 봉상왕을 피해 숨어서 소금장수를 하다가 국상 창조리에 의해 왕으로 옹립. 낙랑군 멸망시킴. 대동강 유역을 확보함.

16대 고국원왕
331-371
15대 미천왕의 아들. 백제 근초고왕 군과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전사함.

17대 소수림왕
371-384
16대 고국원왕의 맏아들. 율령 반포, 불교 수용, 태학 설립 등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함. 삼국 중 가장 먼저 중앙 집권 체계를 갖춤.

18대 고국양왕
384-391
17대 소수림왕의 동생. 재위기간은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함.

19대 광개토대왕
391-412
18대 고국양왕의 아들. 백제 공격으로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신라에 대한 영향력 강화). 재위기간은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함.

20대 장수왕
412-491
19대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평양으로 천도하고,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함.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 후 충주고구려비를 세움. 재위기간은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함.

21대 문자왕
492-519
20대 장수왕의 손자.

22대 안장왕
519-531
21대 문자왕의 맏아들

23대 안원왕
531-545
22대 안장왕의 동생. 왕의 후사를 둘러싼 귀족세력들의 무력충돌 속에서 세상을 떠남.

24대 양원왕
545-559
23대 안원왕의 맏아들.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
559-590
24대 양원왕의 맏아들. 586년 평양 대성산성에서 장안성으로 궁을 옮김.

26대 영양왕
590-618
25대 평원왕의 맏아들.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섬멸함.

27대 영류왕
618-642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연개소문에게 감독을 맡김. 연개소문에 의해 비참하게 죽음.

28대 보장왕
642-668
고구려 마지막 왕.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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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범 박사의 책 "아시아 이상주의" - 역사는 이상과 망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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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millenarianism(아시아 이상주의) 

- Hong Beom Rhee(이홍범)


이홍범 박사 

- 미국 펜실베니아대 역사학 박사 

- 하버드대에서 동학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공 

- 미국 오바마정부 명예장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였다."(18p) 


"한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과 그 외의 국가에 있는 대다수의 한국 전문가들은 식민지 유산의 덫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많은 한국의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에 틀린 잘못된 사고를 배우고 전파했던) 이병도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을 닦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한국, 중국, 일본 역사 자료들을 찾아내고 읽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골치 아픈 과제이기 때문이다." (16-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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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슬픈 역사는 스스로 만든 것도 없잖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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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되고, 과거 속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아픔은 배가된다."


왜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왜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다짐하지 않는가?

왜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지 않는가?


한민족의 역사가 어두워진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왕(지도자)의 지나친 호의와 무능

둘째, 내부의 적


우리가 잊고 있지만, 주변국 일본과 중국은 그 헛점을 매우 잘 파악하고 있다.


1. 고조선


고조선은 망했다. 아주 기가 막히게 어이없이 ㅜ


연나라 위만이 천여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서 조선에 들어와 고조선 준왕에게 고공지의 수비를 하겠다고 속여 신뢰를 얻었고, 자기 세력을 기른 후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속여 나라를 아주 손쉽게 빼앗았다.


고조선 멸망의 원인

왕(지도자)의 지나친 호의와 무능 - "뭘 믿고 위만 따위에게 고공지 수비를 하게 하고, 한나라 병사가 쳐들어 온다고 왕의 호위를 맡기나? 그것도 천명에게? 기가 막히고 어지럽다."


2.. 위만조선-흉노-한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 있다 없다라는 유치한 논쟁을 아직까지 하고 있는 이 우둔함. 고조선은 당연히 존재했고, 한나라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당시 고조선은 흉노와 연합을 했고, 당연히 한나라와의 전투는 계속됐다. 당시 한나라는 고조선 왕검성을 여러번 공격했다. 


한서 위현전에서는 "동쪽으로는 조선을 정벌하여 현도와 낙랑군을 설치하여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한서 무제기에는 "천하의 사형수를 모집해 조선을 공격했다."고 적었는데, 고조선의 전투 결과 내용을 놓고 보면 고조선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했음을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전쟁하는 과정에서 패수 서군, 패수 상군 이렇게 군대를 잘 배치해서 한나라 군대를 잘 막아냈다. 사마천도 사기 조선열전 마지막에 평을 써놨는데, 결코 한나라가 전쟁을 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불운은 결코 밖에 있지 않았다.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던 참 니계상(재상)이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왕검성이 함락되고 위만 조선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위만조선의 멸망의 원인

내부의 적 - "참 니계상(재상)의 우거왕 살해"



3. 고구려


고구려 당시에도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고구려가 대신라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을 때 당은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長安)에 입조시키라고 요구해서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양분돼 치열히 논쟁했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라고 주장했고 온건파는 왕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과 관계를 더 돈독히 하자고 주장했다.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 손을 들어주었고, 640년 왕태자 고환권을 장안으로 보내자 641년 당 태종은 진대덕을 보냈는데, 이는 요수에서 평양성까지의 고구려 지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각 성의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당에 귀국한 진대덕은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간언했다. 


강경파의 화가 극에 이르렀는데,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까지 중단하자고 주장하였다. (왜 그랬을까?)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이에 반발했고, 온건파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열병식 때 조정 신하들을 대거 준인 후, 영류왕 까지 살해하고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의 아들인 보장을 옹립했다.


그 후, 연개소문이 죽은 후, 세 형제는 골육상쟁으로 고구려의 패망을 앞당겼다.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쫓겨난 연남생은 당으로 도망쳐 고구려 공격에 앞장서는 등, 고구려의 안타까운 패망에는 연개소문과 연걔소문의 형제들이 있었다.


고구려의 멸망원인: 둘다 있음

첫째, 왕(지도자)의 지나친 호의와 무능

둘째, 내부의 적


4.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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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꼭 짚어볼 점들 "역사는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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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 역사는 반복된다

- 한국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1. 국제 주변 정세의 정확한 파악 부족"

한국은 유난히도 역사적 선택이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선 적이 많았다. 역사적으로 고난이 많았던 가장 큰 원인은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배우지 못하면 한국은 다시 한번 위험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정치자들이야 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당선이 되야 하는데, 그 짧은 권력과 자기 성공만을 위한 유치한 그 한놈의 욕심으로 인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2. 인재의 정확한 활용방법에 대한 무지"

인재를 정확하게 기용하고 정확하게 관리하는 것은 작은 회사도 마찬가지다. 경영을 잘해야 나라가 잘 운영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유난히 쿠테타가 많다. 그리고 내부 배신자, 배신국가(신라)가 많았다. 이것은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한국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어 왔다.


1. 고조선


거의 신화 취급을 받는 고조선은 한국의 기원이 되는 나라인데 비파형동검 등과 여러 유적을 통해 요하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에서 나온 것과 같이 고조선이 망하게 되고 고조선 유민이 한반도로 남하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역사의 기록이 없지만 국가가 망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망한 이유는 뭘까? 바로 주변을 살피지 않은 죄!다.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서 잘 판단하려면 주변을 샅샅히 파악해야 한다.


2. 고구려


쿠테타 하면 조선을 세운 이성계나 박정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주 오래전 고구려가 망하기 직전에도 쿠테타가 있었다. 


영류왕 14년(631년)에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던 끝에 그를 죽이려 모의했으나, 연개소문은 이것을 사전에 눈치를 채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였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좌지우지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망하는 주요원인이 되었고, 그 몰락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합작했다. 연개소문의 세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중 첫째 연남생은 당으로 넘어가 현재의 친일파와 같은 친당파로 변모했고, 고구려를 무너트린 후 당나라 벼슬을 받았고, 막내 연남산도 보장왕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었는데 당나라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 의아하다.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허난성에서 묘비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역시 당나라, 신라, 백제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망했고, 결국 내부 배신자 때문에 망했다. 


3. 신라


신라 역시 한국 역사의 큰 틀에서 보면 자주적인 국가의 형태를 처음으로 내던진 나라로 기록되게 됩니다. 당과의 연합으로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외세의 힘을 끌어들였고, 결국 한반도 남부가 유지하다가 망하게 되었다.


4. 조선


신라에 이어 사대주의, 신하국 등 별의 별 이상한 말을 만들어 가면서 가장 비참한 국가 형태를 유지했다. 조선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세웠으며, 비상식적으로 비자주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망했다. 막판에는 왕권은 그냥 장식일 뿐, 외척, 즉 왕비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어가는 세도정치를 하다 국제질서 파악도 못하고 망했다.


5. 조선 중기 -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했는데,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넘겨준 조총 2자루가 일본 군대도 변하게 하고, 일본이 한국이 침략하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한국은 이미 매우 이른 시기에 조총을 넘겨받고도 청나라 속국의 관계를 져버리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 (자주적인 나라) 오히려 명과 함께 일본을 무너트렸으나, 스스로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 속국이 됐다.


6. 조선말기 - 일제침략기


조선은 너무 심하게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각종 사건이 터질때마다 조선왕실은 청나라 군대를 요청했다. 4백년이 지난 엄청난 세월 동안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결코 자주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막말로 확실한 빙신 짓이었다.


외톨이, 우물안 개구리 신세도 면치 못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이전에 사실 자주적인 국가로 발돋움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미국, 프랑스, 영국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천주교인을 학살하면서 병인양요를 스스로 만들어냈으며, 미국이 통상을 요청했는데, 이를 공격해서 발생한 신미양요로 서양사회와 친구가 아닌 적관계가 되어 버렸다. 


영국도 조선과 통상을 요구했는데, 프로비던스호(The Providence)가 1797년 정조 21년에 원산 근해를 항해했던 것을 시작으로, 1832년 순조 32년에는 로드 암허스트호(The Lord Amherst)가 충청도 홍주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통상을 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의 집정 시에는 로나호가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에 나타나 통상 요구를 해왔고, 셔먼호는 평양에 와서 통상요구를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렇게 한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기 위해 연해주, 만주까지 와 닿으며, 우리의 만주, 간도 땅을 야금야금 다 먹고 있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이런 남하를 저지하려고 온 것도 모르고, 영국, 프랑스, 미국을 쳐부수고, 러시아에 빌 붙으려고 하는 액션을 취했었다.


정말 국제 정세를 몰라도 이렇게 모를수가 있을까? 이 시점에도 청나라와 러시아에 빌붙으려는 국가가 정말 나라냐? 그냥 왕가 10명 유지하려고 한반도 전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한다는게 말이나 되나??


암튼 그러다가 결국 일본한테 식민지를 당했다.


7. 2018년 현재


한국 일부 언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친중파.. 심지어 러시아랑 친해져야 한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한국은 절대 러시아, 중국과 함께 미래를 꿈꿀수 없다. 왜일까? 현재 러시아 경제는 처참할 정도로 성적이 나쁘며, 중국 또한 전 세계 무역의 문제점을 발생시킬 뿐 더이상 저가정책으로 전 세계에서 부상하기 어렵다. 또한 중국은 기본적인 정의, 인권, 양심이 없고, 일반 대중, 시민의 자유와 발언 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은 모든 것이 과거 청나라 시대 마냥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책에만 관심이 있다.


한국이 잘 살고 강대국이 되려면 한국은 잘사는 나라들과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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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부터 여성 지도자? 평창 비파형동검과 여성인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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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군에서 특별한 무덤이 발견됐습니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된 인골을 2년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요, 한국에서 청동기 무덤에서 지배층의 전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사람뼈(인골)이 출토된 것은 최초였습니다.

출토 동검의 양식은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됩니다. ​(모양만 보고? 연대 조사는 2년 동안 안한거냐? 일 요따구로 할래? 한심하다.)


여성의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로 추정되며,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월등히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습니다.

보통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는 신라시대 여왕들이 많이 알려져 왔었는데요, 사국시대 당시에도 신라를 제외하면 고구려, 백제, 가야에 여왕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일 경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사장은 남녀의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과거의 제사장이 여자도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무당입니다. 무당은 조선시대를 지나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선사시대는 이 무당과 비슷한 제사장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던 시기였습니다. 크게는 가뭄부터 질병, 전쟁 등 여러 두려움의 해소가 절실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이미 학계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 바로 여성인골입니다. 일본에선 청동기시대였던 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 여성 제사장이었던 히미코가 왕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재현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의 비파형동검 등 물질 중심으로 청동기문화가 일본에 전래됐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 발견을 통해 여성의 사회 참여 등 사회·정치적인 제도 역시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시물은 2018년 2월 20일부터 강원대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평창올림픽 기간 많은 외국인들에게 홍보되고 언론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많이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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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사극 복장 완전 엉터리! 갑옷 없는 포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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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사극을 보면 다루는 연대가 조선시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포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평상복이 일반 백성들이 입는 옷으로만 되어 있다면 과연 각종 싸움, 범죄 등과 싸울수 있었을까요?


위 사진을 보면 붉은 황금빛은 고구려 갑옷(맨 위 이미지), 회색+황금+파랑이 조화롭게 섞인 것은 백제 갑옷(가운데), 맨 아래 것들은 삼국시대 출토된 갑옷들입니다. 가짓수가 정말 많고 화려합니다.

이렇게 삼국시대는 갑옷이 화려했는데 조선시대만 갑옷이 없었을리가 없습니다.


일본 측 자료 그림입니다. 조선군의 옷 색이 다양하고 일반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 자료입니다.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의 말을 기록한 곳에서도 조선군도 왜군, 명군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서양처럼 철로 된 투구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위 사진은 찬란했던 고구려 시절의 갑옷입니다. 말까지 철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했습니다. 이런 류의 갑옷은 서양에선 언제 나왔을지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아마도 고구려가 최초가 아니었을까요?


조선시대 민화를 보면 나오는 포졸복은 평상시의 관원 복이 맞을 것입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전쟁이 아니면 관원복을 입었습니다.

이렇듯 TV 사극의 전쟁신 장면의 문제는 바로 무지하고 무식했던 PD나 연출자의 잘못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텔레비전에서 황당한 의상과 설정을 하는 장면을 내보내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방송도 이제 잘못하면 벌금제와 그에 상응하는 벌칙을 주는 제도를 강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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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꼭 호랑이, 토끼가 아니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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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보통 자신을 구두라고 표현한다. 진짜 구두 모양 같기도 해서 신기하다. 그래서 관광 상품에 적극 활용한다. 구두 모양 음료수병, 도자기 등등

한반도는 남쪽 지형이 아일랜드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특히 서쪽 해안선과 지형이 닮아있다.

일각에서 한반도를 호랑이나 토끼를 닮았다고 하는데.. 굳이 어느 동물을 닮을 필요나 그 이유는 없다. 이런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탈리아처럼 관광 상품에 활용을 하던가.. 그래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바로 그 얘기가 나온 목적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일본이다. 한국을 깔아 뭉개기​ 위해 한반도가 토끼 닮았다고 한거고, 한국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 것이다.하지만 한반도는 그 어느것도 닮지 않았다. 그냥 일본의 말을 무시하면 그만이다. 일본 반도가 원숭이가 납작 엎드린 모양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올해부터는 이런 의미없는 말들이 그만 반복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들은 보통 학교 교사(선생님) 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하곤 하는데, 본인들이 가장 심각한 가해자(?), 원인제공자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 사회의 모든 현상의 책임은 직간접적으로 교사(선생님)에게 있다.

올바른 교육과 예시로 바른 교육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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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이 이렇게 역사가 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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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지역에 이런 오래된 유물들이 넘쳐나다니.. 정말 대단하다. 과거 고조선계 유물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춘천과 함께 가평도 옛날부터 조상들이 살던 곳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특히 토기가 매우 신비로웠다. 저 당시에도 저렇게 옹기와 그릇을 만들었다. 그것도 고조선과 한반도 특징이 뚜렷했다는 것에서 우리가 중국과 다름을 명백하게 드러내 준다.

사실 중국 북경 지역을 여행했을때 만주, 중국 서부 보다도 중국인들이 매우 다름을 확인했다. 보통 북경과 상해 사이 출신을 진짜 중국인으로 보고 있다.



토기의 안팎을 보면 무늬들이 있는데 이것도 매우 신기했다. 빗살무늬는 고조선과 한반도를 대표하는 무늬이었다. 근데 저기 안에 보이는 무늬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자극했다.

뭔가 역사의 실마리를 품고 있는 듯... 유물들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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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외신 보도, 화를 내지 말고 관련 일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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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개회식(개막식)에서 미국의 NBC 앵커가 ‘일제 식민지 기간’을 언급하며 한국이 일본 문화 및 기술, 경제를 모델 삼았다는 황당한 얘기를 했습니다. 한 나라를
소개하는데, 그것도 대회 개최국인데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해당 해설자는 짤리고, NBC는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또한 영국 더 타임즈는 한반도기를 설명하면서 “독도는 일본이 소유한 섬”이라고 보도를 냈는데 아이나 다를까 글을 쓴 사람은 일본 특파원이었습니다.

일본은 주도 면밀하게 과거부터 왜곡된 자료를 영어로,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번역해 배포했으며, 외국 주요 인사와 인맥을 만들기 위해 혈안인 것으로 드러난 바 많습니다.

일본인이 유독 비틀즈 멤버, 할리우드 스타들과 결혼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각종 국제 기구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고, 일본은 주도면밀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화만 내지 말고 관련된 홍보일, 로비(국제적 로비는 현재 불법이 아님) 등을 해라!! 언제까지 앉아서 당하기만 할까?!

사실 평창올림픽 조직위는 한국 홍보 및 이런 불미스런 일들에 대한 대비를 했다고 보시나요? 답은 “노”입니다.

NBC 해설자는 이미 퍼진 잘못된 정보들을 봤었을테고, 더 타임즈 일본 특파원은 일본인들의 조직적인 홍보에 귀가 멀었겠죠.. 그런 우리는 해외에 어떤 한국 홍보를 냈습니까? 아예 없고 조직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일을 하십시오! 화만 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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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중국 역사 왜곡 고발 "해외에 모든 자료/지도 오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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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지도 이미지 - 경악 수준!!


중국의 심각한 역사 왜곡 현장을 고발합니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를 통해서 한국 관련된 지도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주로 내용 뿐만 아니라 지도(맵 Map)과 관련된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한국의 북부, 심지어 중부까지 한나라라고 거짓되게 오류된 지도를 전 세계에 배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위 사진을 보면 그 밖의 서쪽 고비사막 지역부터, 몽골지역, 남부 지역 (베트남 포함) 까지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과 연락을 했던 교류를 했던 곳을 색칠한 느낌마저 듭니다. 혹은 강제로 니들은 우리 영역이다라고 생각한 것들은 표현한 것 같이 보입니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면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매우 필요합니다.


또한 아래 지도들을 보면 위키피디아 등에서 나오는 지도인데, 한나라의 영역을 매우 다르게 또는 좁게 표현하고 있으며, 맨 마지막 지도를 보면 그 영역이 매우 작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이 지도에서도 한반도 관련 역사 왜곡한 내용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심하게 왜곡된 지도는 당나라 지도로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 영역으로 표시한 것으로 이것은 왜곡이라기 보다는 한국에 대한 무시, 경시, 멸시로 까지 이해해도 될만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적은 늘 근처에 있습니다. 중국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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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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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땅이다.

빨리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세계 모든 자료를 일본모르게 다 바꾸고) 교과서에 표시하고,

외교부 사이트에 정식으로 일본은 한국령이라고 하면 끝난다...

근거는 없다. 그냥 그럴듯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소설을 쓰면된다.

바로 이 방법은 온 세계에 선량한 이미지를 심어 일본을 사랑하게 했던

똑똑한 일본인의 남의 나라 땅 독도 빼앗기 방법이다.

얼마나 간단하고 유치한지..

추가로 얻을 수 있는 건 일본인들의 심장병 유발, 스트레스 강화, 불행도 증가 등이 있다.

그러면서도 삼성, LG 등 한국제품을 일본에 최대한 수출하여 일본에서 이익을 챙긴다.

일본시민들은 멍청해서 한국제품을 잘 사주고 "일본이 한국땅이라고 했던 말"은 다 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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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 윗대가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건 아닐지 의문이다!!!

어쩜 그리도 멍청한 인간들만 정치인이 되는지... 불쌍하기도 하다!!

한번 우리도 일본과 같이 간단하게 빨리일본을 한국령으로 만들도록 하자!

 

그런데 너무 웃기지 않은가? 아마도 세계가 오히려 한국을 탓할것이다.

그런데 더 웃기지 않은가? 왜 한국은 세계가 일본을 탓하도록 상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헷갈린 애매모호한 분쟁지역으로 남도록 내버려두는 건가?


 

◈ 한국 정치인들의 독도 관련 한 일

    1. 해외 지도자와의 만남 Zero

    2. 해외 지도자에게 직접 알린 적 Zero

    3. 관련 단체 지원 Zero

     ..... 모든 것이 제로다! 제로!

내가 볼땐 독도 문제는 한국 정치인들의 문제이다.

한국은 말도 안되는 "일본은 한국땅이다"하고 헛소리를 할 정도로 강심장이 없거니와

전략, 노력도 없다.

이 얼마나 기가 찬 상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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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Z 제7광구 - 석유 매장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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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그 당시 해양법을 기준으로

남한 남해 먼바다에 제 7광구 영토 선언을 한다. (JDZ)


 

무려 남한의 80%나 되는 엄청난 바다 영토~

중요한 것은 이곳이 한때는 중동보다 석유와 가스가 많을 것이란 소문으로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제 2의 페르시아 걸프만이라고 불림)

 

석유매장량은 추정 약 1000억배럴
미국대륙 매장량의 4.5배

 

천연가스매장량은 180조 쿠빅비트로
걸프 유전의 8.6배
미국대륙 매장량의 1.6배

 


해양법 기준으로 7광구는 남한과 대륙붕으로 연결이 되는 곳이다.

국제적 정황을 잘 알았던 일본은 급기야 공동 개발 제의를 한다.

그 당시 기술이 약했던 한국으로서는 (나라면 미국, 러시아 아님 유럽이랑 협력한다 -_-)

일본과 공동 개발을 허락하고야 만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교묘한 일본은 공동 개발이란 면목으로 법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왜냐? 공동 개발이란 독자 개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일본이 원치 않으면 한국도 7광구를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계약을 제대로 못하는 (조선도 결국 계약으로 망했음) 한국이

또 한번 계약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설상가상인지... 일본의 계략인지 몰라도

현재 해양법은 대륙붕보다 200해리가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럴 경우 한국은 제 7광구(JDZ)의 80% 이상을 잃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UN에서는 한국과 일본 같이 200해리 안에

서로 영토가 겹치게 될 경우에는 대륙붕으로 연결된 쪽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할 경우 대륙붕 기준 영해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육지영토연장이론에 의하면 일본은 오키나와 해구에서 단절되나, 한국은 대륙붕으로 자연연장되어 있다.)

 


1999년 UN 대륙붕 한계 위원회는 10년이란 기간을 주며

전세계 국가들에게 자국 대륙부이 왜 자신들 소유인지 근거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주요국이 (일본 포함 약 51개국) 수백 페이지에 걸친 조사 보고서를 체줄한 것과는 달리

한국은 과학 기술적 능력이 없거나 재원 부족으로 대륙붕을 조사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을 위해

임시로 만든 예비정보 문서에 해당하는 8페이지 짜리 문서를 제출했다.

(아마 대학교 1학년도 이것보다는 잘 썼을것 같다.)

 

 

 

 

현재 무한한 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7광구 JDZ 바로 옆

850m 바로 옆에서 중국과 일본이 유전 공동 개발을 선언하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이 그렇게 집요하게 같이 개발하자고 할때는 꿈쩍도 않던 일본이

바로 코 앞에서 중국과 공동개발을 한다고 나선것이다.

 

 

 

 

더 웃긴 것은 유전 지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서

근처에서 유전이 시작되면,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빨대 효과)

그래서 많은 아시아 연구 박사들은 한국이 빠른 시일내에

중국, 일본과 협상을 요구하는 고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실 중국도 일본의 빨대효과 논리 반박으로 공동개발을 허락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부 및 외교부는 잘 알다시피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고 있다.

(멍청한 외교인지.. 뭘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가만히 앉아만 있는 외교인지 알길이 없으니..)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한국은 일본과 같이 바다로 둘어쌓인 나라다.

 

이런 나라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영해관련 외교에서 저자세로 일관한다면

엄청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한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2028년 종료될 예정인 한일간 JDZ 협약을 연구하여

대책과 대안을 마련하고, 현재 중일 공동 개발로 진행중인 지역을

한중일 공동 개발로 확장시켜야 한다.

 

또한 계속 일본이 공동 개발에 참여하지 않으면

국제법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역으로 공격을 할 채비를 해둬야 한다.


 

더이상 한국이 계약과 관련하여

멍청한 짓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분야를 연구할 전문 부서를 뒀으면 좋겠다.

 

간도, 독도, 7광구, 역사, 단군 연구, 홍산 문화 연구....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 국가적으로 이런 일을 관장하는 곳이 없다니 한심하다.

한국 국회위원들!! 국회 싸움이나 하고 언제 정신 차릴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하는 국회위원까지 욕을 먹고 있다.


 

이제 모두다 정신 차리고 빨리 해결할 일들은 잘 풀어 나갔으면 좋겠다.

 

 

KBS 시사기획 쌈

<JDZ, 한·일 석유 전쟁>

보기 Click! ▶ http://news.kbs.co.kr/article/politics/200909/20090915/1846703.html

 

아고라 서명 ▶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8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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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도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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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18세기 영국서 제작한 아시아전도.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에 포함

3번. 1769년 프랑스 제작 아시아지도.압록,두만강 이북의 간도 일부 조선 영토 포함

4번. 러시아에서 1854년에 제작한 아시아전도. 만주 일부를 조선 영토 포함

 

 

 많은 지도도 필요없다.

한국이 만들었던 지도도 아니었다.

 

 

바로 그당시 청 관리가 직접 유럽에 넘긴 자료로

만들어진 한국 관련 지도들에 간도는 분명 존재했고,

한국의 영토는 지금보다 북쪽 만주까지 뻗쳐있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가 제작한 지도 중 일부

한국 관련 자료는 당시 청이 직접 영국에 넘겨준 것이었다.

 

 

일본이 제멋대로 판 만주...

일본이 중국에 배상을 하고 한국에 찾아주던지

통일한국이 중국과 협상을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것이

러시아, 중국이 정한 러중 경계선 협정이다.

아니? 누구맘대로~

둘나라에게 모두 요구만 하기보다

한나라만이라도 먼저 찾는 전략이 필요하다.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서울, 대구, 원산 권역 중 간도가 원산에 포함되어 있음.

 

 

저렇게 넓었던 북쪽의 한국땅...

중국이 남북 통일을 막는 이유가

이제서야 또렷해지는 느낌이다.

 

 

한국인들아~

외국인들은 절대 한국을 위해주지 않는단다.

너희들이 너희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리?!

 

 

중국에 이용당하지 말고,

한국인들아~ 아니 북한인들아~

정신 좀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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